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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윤기중 고향 출생지 학력 대학 학교 딸 자녀 윤석열 어머니 모친 최정자

국내 통계학 거목' 故윤기중 교수…"통계학계 훌륭한 어른"
- 2023. 8. 15

15일 92세 일기로 별세한 고(故)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는 '윤석열 대통령 부친'이라는 수식어 외에도 우리나라 통계학의 기틀을 잡은 원로학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1931년 충남 논산 출생인 윤 교수는 공주농고를 졸업한 뒤 연세대와 일본 히토쓰바시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이후 한양대 경제학과와 연세대 상경대학 응용통계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한국경제학회 회장을 지낸 경제학계 원로로 꼽힌답니다.

특히 경제학 분야 중에서도 국내 통계학의 기틀을 잡은 업적으로 유명하다. 통계학계 또 다른 거목(巨木)인 고(故) 김준보 선생을 도와 한국통계학회 창립을 주도했고 1977~1979년 한국통계학회장을 역임했다.

윤 교수는 통계학(1965년), 수리통계학(1974년) 등 교과서를 집필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현재 국내 통계학 분야 1인자로 꼽히는 류근관 전 통계청장(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도 대학 시절 윤 전 교수가 쓴 책으로 통계학을 공부했을 정도다.

류근관 전 청장은 이날 머니투데이와의 통화에서 "윤 교수는 통계학계에 훌륭하신 어른"이라며 "지난해 한국통계학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았을 때 좋아하셨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데 갑자기 돌아가셔서 안타깝다"고 말했답니다.

많은 후배들로부터 존경받는 고인의 면모는 박사 학위 거부 일화에도 잘 나타난다. 윤 교수가 대학에 다니던 1950~1960녀대만 해도 석사 학위만 있으면 교수를 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윤 교수도 석사 학위만 갖고 교수가 됐다. 당시 석사 학위만 있는 교수들을 위해 간단한 논문을 쓰면 박사학위를 주는 '구제(舊制) 박사' 제도가 있었는데 윤 교수는 이를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윤 교수는 주변에 "그런 식으로 학위를 받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말했다고 한다.

윤 교수는 통계적 방법을 사용해 경제 현상을 분석하는 연구를 하면서 부의 분배, 불평등 문제에 천착한 것으로 유명하다. 주요 논문으로는 △소득 요인별 불평등도 분해(1994년) △1920년대와 1930년대 한국경제학계 동향 △불평등에 대한 재평가(2000년) △한국의 교육비 탄력성과 불평등(2002년) 등이 있답니다.

정치 신인 대통령 첫 역사썼다
- 2022. 3. 10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정치인으로서 스스로 선택한 자신의 정체성이다. 그는 이 여덟 자를 들고 대선 후보로 나서 당당히 당선됐다. 당선 자체로 역사를 썼다. 헌정 사상 첫 전 정부 검찰총장 출신의 대통령, ‘0선’ 대통령이 됐다. 윤 당선인은 정치를 선언한 지 9개월, 보수 정당인 국민의힘에 입당한 뒤 8개월 만에 이 모든 역사를 기록했다.

윤 당선인은 1960년 서울 출생으로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와 최정자 전 이화여대 교수 사이에서 태어났다. 교육자 집안에서 자란 그는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서울대 법대에 진학하며 그는 ‘강골’로 성장했다. 사법 고시에서 여덟 번을 떨어졌지만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법조인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9수 만에 사법 고시를 통과하고 검사의 길을 걸었다.

윤 당선인은 검사로서 승승장구했다. ‘원칙주의’를 앞세워 권력 수사를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지난 2004년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불법 대선 자금 의혹’ 수사에 뛰어들어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와 당시 그늘막 실세를 자처하던 강금원 창신섬유 대표를 구속했답니다. 


하지만 윤 당선인이 전 국민에게 이름을 각인시킨 사건은 그가 고난을 겪었을 때다. 그는 2013년 박근혜 정부 때 터진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 수사로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에게 겨눴고 권력은 그를 좌천시켰다. 이 사건으로 국정감사장에 나온 그는 검찰 상부의 외압을 실토하며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한마디는 대선에서도 윤 당선인이 ‘오직 국가와 국민·헌법에 충성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2016년 말 그는 ‘최순실 게이트’ 특검팀 수사팀장으로 3년의 좌천 끝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정권을 교체한 문재인 정부는 그를 전폭적으로 신뢰했다. 윤 당선인은 문재인 정부에서 중앙지검장에 오르고 2019년 7월에는 무려 다섯 기수를 뛰어넘어 검찰총장에 파격 승진했다.

역설적이게도 검찰총장에 오른 그가 겨눈 쪽은 권력의 실세인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었다. 이를 두고 그는 당시 “저도 인간이라 번민을 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검찰이 권력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야 정부가 성공한다는 그의 원칙은 변함이 없었다. 조국 수사로 그는 문재인 정부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어서 임명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수사 배제와 징계로 그에 대한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민심은 요동쳤다. 민심은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인 그를 야권 대선 주자의 반열에 올렸다. 지난해 3월 검찰총장 직무 정지라는 사상 초유의 징계 사태가 벌어지자 그는 “정의가 무너지는 것을 더는 지켜보기 어렵다”며 사퇴하고 정치의 들판에 몸을 던졌답니다.

6월 29일 그는 윤봉길기념관에서 정치 선언을 했다. “무너진 자유민주주의와 법치, 시대와 세대를 관통하는 공정의 가치를 기필코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여의도 문법을 모르는 그의 9개월간의 짧은 정치 여정은 서툴렀다. 7월 ‘기습 입당’을 두고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충돌했다. 경선 과정에서는 정책 비전 부족으로 당의 고참 후보들에게 난타를 당했다. 이어서 터진 배우자의 허위 학력 문제는 정치생명을 끊는 수준의 치명상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진 집념, 수많은 고초에도 버틴 강골 기질과 맷집으로 이를 버텨냈다. 배우자 문제는 국민에게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또 공약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진정성, 무너진 시장경제를 바로 세워 경제를 살리겠다는 원칙을 강조하며 민심을 얻었다. 그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를 찾아가 “나를 믿어달라”는 한마디로 역사상 첫 중도·보수 진영 단일화라는 드라마를 써냈다. 윤 당선인은 이제 제20대 대통령 당선인으로 자신을 부른 국민께 충성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국민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강조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