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예능 '스톡킹'에 출연한 구대성은 "현역 의지가 강했다. 50대까지 야구를 하고 싶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왜 그만뒀냐면, 허리에 문제가 생겨서다. 주사를 세 번이나 맞았다"고 얘기하며 "근래 좋아져서 다시 몸을 만들고 있다"고 얘기했다. '선수를 다시 하려는 건가' 묻자 구대성은 "프로에 들어가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한국으로 치면 독립리그 정도"라고 말했다.
실제 구대성은 불과 몇 년 전 정식 경기에서 마운드에 오른 적이 있다. 2019년 호주야구리그 질롱코리아 감독이던 당시 구대성은 투수로 등판해 1피안타 1볼넷을 기록했으나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구대성은 "이때는 2년 정도 공을 안 던졌다. 연습을 전혀 안 하고 던졌는데 진짜 힘들더라"고 돌아봤다.
구대성은 "ABL(호주야구리그) 요청에 의해서 던졌다. 호주 야구 활성화를 위한 이슈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며 "마지막에 던진 이유는 선수가 없어서다. 엔트리가 22명이고, 투수 9명을 데리고 했다. 선수들이 아프니까 코치 3명이 모두 엔트리에 들어가 있었다"고 설명했답니다.
'지금은 (투구수) 몇 개까지 던지느냐"는 질문에는 "장거리 60~70m는 100구까지 던진다"고 말해 놀라움을 안겼다. 그는 "더 던지고 싶어도 몸이 안 되더라"면서도 "웨이트를 상체, 복근, 하체 한 시간 씩 이틀에 한 번 하고 있다"며 50대의 나이에도 여전한 자기관리로 감탄을 자아냈다.
한편 구대성은 JTBC 야구예능 '최강야구'를 보고 있다며, "'최강야구'에서도 던지실 수 있냐"고 묻는 심수창의 물음에 "나는 영광이다. 후배님들과 같이 야구하면서 또 배울 수 있는 게 있다"고 답했다. '저 선수보다는 잘 던질 수 있겠다 한 선수가 있냐'는 질문에는 심수창을 바라보며 "후배님보다는"이라고 말해 웃음을 안겼다.
- 프로필 이력 경력
나이 생일 생년월일 1969년 8월 2일 (53세) 국적 대한민국
고향 출신 출생지 대전광역시 동구 학력 신흥초 - 충남중 - 대전고 - 한양대학교
가족관계 배우자 부인 아내 와이프 권현정 아들 구상원, 딸 구영은 형 구대진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3년 1차지명 (빙그레 이글스) 소속팀 빙그레 이글스 (1994~... 빙그레-한화 이글스 (1993~2000 / KBO) 오릭스 블루웨이브 (2001~2004 / NPB) 뉴욕 메츠 (2005 / MLB) 한화 이글스 (2006~2010 / KBO)
시드니 블루삭스 (2010~2015 / ABL) 질롱 코리아 (2019 / ABL)
지도자 호주 U-15 야구대표팀 감독 (2016) 시드니 블루삭스 투수코치 (2016~2017) 질롱 코리아 감독 (2018/19)
前 한화 이글스 출신 좌완 투수이자 前 질롱 코리아 감독.
현역 시절 빙그레 이글스와 한화 이글스에서 활약하면서 KBO 리그 역사상 단 2명만이 해낸 투수 4관왕이라는 대기록을 최초로 달성했고, 이후 NPB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도 평균자책점 2위에 오르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말년에는 MLB 뉴욕 메츠로 이적하면서 한•미•일 무대를 모두 밟아보기도 했다.
임창용과 함께 한국 야구의 대표격인 중무리 투수였으며, 대표적인 별명은 '대성불패'와 '일본 킬러', '쿠옹 등이 있다.
현 시점까지 한화 이글스의 유일한 한국시리즈 MVP랍니다.
대성불패' 구대성 - 2022.01.25
등판하면 지지 않는다. 이름 뒤에 불패(不敗)가 붙었던 선수, ‘대성불패’ 구대성(53)이 일간스포츠가 선정한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 불펜 투수 부문에 선정됐다. 20대부터 50대까지 세대별 야구인 10명씩 총 40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오승환(32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총 19표를 얻었다.
이동욱 NC 다이노스 감독은 "언제든지 믿고 투입할 수 있는 투수"라고 했다. 이대진 SSG 랜더스 투수코치는 "불펜 투수는 10번 중 7~8번은 성공해야 한다. 구대성은 그에 가장 가까운 투수"라고 했다. NC 이용찬은 "구대성 선배님은 던지는게 참 시원시원했다"고 했다. KT 위즈 소형준은 "오승환 선배님 다음으로 임팩트가 가장 강하게 남아있다"고 전했답니다.
구대성은 고교 시절부터 담대한 배짱으로 주목 받았다. 대전고 2학년 시절이던 1987년 연습 경기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선발로 올라왔던 그는 1회 초부터 3연속 볼넷으로 무사 만루를 허용했다. 이병기 당시 대전고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오자 그는 “절 테스트하는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결론은 3연속 탈삼진 무실점. 배짱 테스트는 성공이었다. 그해 대전고는 청룡기에서 창단 첫 전국대회 우승을 거뒀다.
한양대 진학 후 그는 1990년 국제야구연맹(IBA) 대회 최우수선수(MVP), 1991년 대륙간 컵대회 최고 투수상, 1992년 대통령배 최우수 투수상을 받았다. 구대성에게 연고팀 빙그레 이글스(한화 이글스 전신)는 계약금 1억 2000만원을 선사했다.
프로 시작부터 ‘불패’는 아니었다. 고교-대학 때 너무 많이 던져 어깨에 탈이 났다. 시속 140㎞대 후반을 기록했던 구속이 130㎞대까지 떨어졌다. 2년 차 때부터 꽃을 피웠다. 마무리를 맡으며 34경기(선발 9경기)에 등판해 7승 8패 12세이브 평균자책점 2.60으로 활약했다. 이듬해에도 47경기(선발 12경기) 4승 14패 18세이브 평균자책점 3.54를 기록했다. 완투도 6번이나 기록했지만, 승운이 따르지 않아 다패왕에 올랐다. 긴 이닝을 던지고 선발까지 겸하는 이른바 ‘중무리’였지만 묵묵히 맡은 바를 해냈다. 동시대를 뛰었던 조원우 SSG 코치는 "선발과 마무리를 전부 잘했다. 전성기 구위가 최고였다"고 전했다.
1996년, 드디어 불패의 수호신이 됐다. 55경기에 등판해 55경기 139이닝 18승 3패 24세이브 평균자책점 1.88 탈삼진 183개로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다. 다승 공동 1위, 세이브 2위, 승률 1위, 탈삼진 3위를 기록했고, 규정 이닝을 채워 평균자책점 1위까지 독차지했다. 당시 수상 기준이던 세이브 포인트(구원승+세이브) 40개로 구원왕까지 오르며 4관왕에 올랐다. 정규시즌 MVP와 투수 골든글러브도 당연히 그의 차지였다. 대성불패라는 별명도 탄생했다.
구대성을 불패의 투수로 만든 건 투구폼, 그리고 배짱이었다. 그는 타자에게 등을 보인 채 와인드업하는 토네이도 폼으로 타자와 주자를 위협했다. 등뒤에서 빠르게 공을 뿌려 구종을 숨기는 디셉션(Deception)의 달인이었다. 무엇보다 강한 멘털이 구대성의 최고 결정구였다. 강속구가 사라진 후에도 자신있게 스트라이크를 꽂아넣었다.
김종국 KIA 타이거즈 감독은 "구대성 선배처럼 배짱 있는 투구를 하는 투수를 본 적 없다"고 했고, KT 위즈 박경수는 "구대성 선배님의 릴리스 포인트가 보이지 않았다. 우타자 몸쪽과 바깥쪽 제구도 자유자재로 하셨다. 너무 까다로웠다"고 떠올렸다.
구대성의 공은 큰 무대로 갈수록 빛났다. 한화의 첫 우승을 이끈 것도 구대성이었다. 1999년 한국시리즈 5경기에 모두 등판해 1승 1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0.93으로 뒷문을 걸어 잠그고 시리즈 MVP가 됐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34위 결정전에서 일본 대표팀을 상대로 선발 투수로 등판한 구대성이 공을 뿌리고 있다. 사진=IS 포토
2000년 시드니 올림픽 34위 결정전에서 일본 대표팀을 상대로 선발 투수로 등판한 구대성이 공을 뿌리고 있다. 사진=IS 포토 김인식 전 감독은 "리그뿐 아니라 국제대회에서 활약이 돋보였다"고 했다. 국제대회에서는 역사상 최강의 일본 킬러로 통했다. 대학 시절 1989년 대륙간 컵에서 후일 메이저리그(MLB) 123승에 빛나는 노모 히데오와 맞대결에서 18탈삼진 완투하며 명투수전을 펼쳤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3·4위전에서 마무리가 아닌 선발로 등판, 155구를 던지며 9이닝 5피안타 1실점 완투승으로 동메달을 한국에 안겼다.
KBO리그를 평정한 구대성은 2001년 일본프로야구 오릭스 블루웨이브스와 계약했다. 첫해 선발, 중간, 마무리를 오가며 7승 9패 10세이브 평균자책점 4.06을 기록했다. 이어 2년 차 5승 7패 평균자책점 2.52로 퍼시픽리그 평균자책점 2위로 활약했다. 2004년까지 오릭스에서 뛴 그는 2005년 도전의 무대를 미국으로 옮겼다. MLB 뉴욕 메츠와 계약해 33경기 23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3.91 6홀드를 기록했답니다.
2005년 5월 22일(한국시간) 뉴욕 양키스전에서 뉴욕 메츠 주자였던 구대성이 상대 포수 호르헤 포사드를 피해 홈으로 슬라이딩하고 있다. 사진=AP 연합뉴스
2005년 5월 22일(한국시간) 뉴욕 양키스전에서 뉴욕 메츠 주자였던 구대성이 상대 포수 호르헤 포사드를 피해 홈으로 슬라이딩하고 있다. 사진=AP 연합뉴스 투수가 아닌 타자로 이야기를 남겼다. 5월 22일 뉴욕 양키스전 타석에 들어서 당대 최고 투수 랜디 존슨의 직구를 통타해 2루타를 쳤다. 공격적인 주루로 결승득점까지 기록했지만, 주루 때 어깨를 다쳤다. 결국 그해 9월 지명할당(DFA) 처리되어 미국 생활을 마무리했다.
2006년 귀국한 구대성은 한화의 수호신으로 복귀했다. 평균자책점 1.82 37세이브(리그 2위)를 거두며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이끌었다. 이어 2007년에도 26세이브를 기록했다. KBO리그 역대 최초로 7년 연속 20세이브, 최연소·최소 경기 200세이브를 남겼다.
그러나 영원히 불패는 아니었다. 2008년 마무리에서 물러나며 이후 커리어에서 단 1세이브에 그쳤다. 2010년 한화 유니폼을 벗었지만, 그의 야구가 끝난 건 아니었다. 그해 11월 호주 프로야구(ABL) 시드니 블루삭스와 계약했다. ABL 통산 6시즌을 뛰고 평균자책점 2.13, 구원왕 3번을 받고서야 24시즌, 4개국에 걸쳐 이어갔던 수호신의 역사를 마무리했답니다.
- 플레이 스타일
. 고교 및 대학 시절엔 나름 평범한 투구폼이었다가 프로 경력이 쌓여갈수록 점점 몸을 뒤로 돌리고 팔각도를 낮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상대 타자에게 등을 보인 채로 와인드업해 공을 던지는 기묘한 폼으로 투구한다. 디셉션(Deception)이 좋은 선수로 공 릴리즈까지 걸리는 시간도 매우 짧아서 구종 파악에도 힘이 들며, 공을 치는 타자 역시 공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짧아서 치기 어려운 폼으로 정평났다. 이 때문에 투수의 투구시의 버릇(이른바 '쿠세') 등을 통해 구질을 파악하는 경향이 강한 일본 야구에 매우 강한 면모를 보인다. 메츠 시절 익힌 서클 체인지업과의 조합도 일품. 이 서클 체인지업은 훗날 류현진이 전수받아 잘 써먹고 있답니다.
보통 나이를 먹을수록 체력 문제 때문에 폼이 간결해지는데, 구대성은 나이를 먹을수록 등을 더 돌렸다. 국내 복귀 후 투구 폼은 아예 2루를 보고 선 수준이었다. 훗날 인터뷰에서는 나이를 먹으면서 구속이 떨어지자 타자들에게 최대한 공을 숨기고 싶었다고 밝혔다.[17]이 폼 때문에 왼쪽 무릎에 부상을 입어 KBO 은퇴를 하게 됐지만... 이 배배 꼬인 폼과 좌완이면서도 흔치 않은 사이드암에 가까운 스리쿼터 스로형 투수이기 때문에 좌타자들에게는 거의 저승사자 수준으로 극강이었다. 합법 병역 브로커 타자 대표 이승엽은 "선수 생활 내내 대성이 형 공은 제대로 맞힌 적도 없다."라고 할 정도랍니다
KBO를 대표하는 닥터 K 중 한명으로 투수의 탈삼진 능력을 측정하는 K/9(9이닝 동안 삼진을 몇 개나 잡는지 측정) 수치가 통산 9.74개인데 한 이닝 당 타자 한명은 기본 삼진으로 잡았다는 얘기. 이는 통산 1,000이닝 이상 소화한 투수 중 KBO 역대 1위 기록이다 또한 커리어하이인 1996년에 기록한 K/9은 11.85개로 이는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들 중 단일 시즌 역대 1위랍니다
전성기 시절의 구속은 평균 140km/h 초중반, 최고 구속은 대학시절 156km/h까지 나왔다고 한다. 물론 이건 전성기 시절이고 나중엔 평균 136km/h로 떨어지긴 했다. 프로 데뷔 이전부터 당한 혹사로 커리어 내내 구위가 계속 하락했지만, '투수라는 보직에 가장 적합한 마인드'로 평가받는 배짱과 승부근성은 그를 혹사에도 장수할 수 있게 했다. 일본전 때의 인터뷰 中 "저는 일본 선수들이 제 공을 제대로 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한 것이 단적인 예다.
- 지도자 경력
은퇴후 호주에서 선수활동을 이어가던 구대성은 선수생활을 끝내고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2016년에는 15세 이하 호주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역임했다.
2016년 ~ 2017년에는 시드니 블루삭스의 투수코치로서 활동했답니다
2018년 7월, 호주 프로야구 리그의 질롱 코리아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관련기사 그러나 감독으로서의 역량은 부족한 것으로 보이는데, 2할대에 못미치는 승률을 내고 있다. 1982년 승률 0.188의 삼미 슈퍼스타즈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며, 주전을 모조리 팔아치웠던 승률 0.224의 99쌍방울과 35승 1무 97패, 승률 0.265를 찍은 백인천의 02롯데보다 더 성적이 안 나오고 있다. 물론 역량이 부족하다는 부분에 약간의 변론을 하자면, 현재 호주 프로야구의 수준은 구대성 감독이 세이브왕을 2년 연속 하던 때 보다는 확실히 올라간 것을 경기를 보면 충분히 알 수가 있다. 호주 프로야구 리그 문서에도 있다시피 최근에는 시속 150km를 던지는 호주 선수들도 점점 나오고 있으며, 피지컬 적으로 많이 발전한데다,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온 선수들과 코치들에 의해 야구의 세밀한 부분까지 계속 흡수하면서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곳이 호주 야구리그이다.
이런 곳에 KBO에서 2군에서도 못 버티고 방출되어 나온 선수들, 아예 프로 입단을 하지 못하고 독립리그에서 뛰던 선수들, 고교 및 대학 졸업 직전의 선수들을 이끌고 시즌을 보냈으니 성적이 당연히 좋지 못한건 어느 정도 참작을 해야하는 부분으로 보인다. 다만 이런 모습을 2019/20시즌에도 보여준다면 이에 대한 감독으로서의 책임을 피하기는 힘들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비판은 구대성 감독과 박충식 단장이 섣불리 팀을 구성해서 팀이 계속 포기하는 모습이 보이자 네티즌들은 "호주리그를 우습게 봤다"는 지적이다. [22] 즉 팀 구성을 착실히 다진 후 리그에 나섰어야 했는데 성급하지 않았냐는 것.
한편, 2019년 1월 19일에는 보다못해 본인이 감독임에도 선수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리다 직접 패전조로 등판(...)해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그야말로 답답해서 내가 던진다를 보여줬고 훌륭한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하였답니다
이젠 2019-20 시즌은 팀을 제대로 만들어서 해야 된다. 리그 적응을 우선적으로 하는게 숙제.. 별차 없으면 있으나마나한 팀으로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했는데 질롱 코리아가 19/20시즌 KBO 연합팀으로 구성되었고 신임 감독으로 MLB 출신 그램 로이드가 선임되면서 구대성은 1년만에 질롱 코리아 감독직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구대성이 감독직에서 내려 온 이유가 무엇인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구대성 아내 권현정씨 "200점짜리 남편이자 아빠다" - 2010.09.04
권현정씨는 울지 않았다. 남편의 은퇴식 동안 차분했다. 정든 그라운드를 떠나는 남편의 마음을 헤아리는 듯한 표정으로 그저 "홀가분하고 섭섭하다"고 했다.
구대성은 "인생에서 가장 힘이 되준 사람"이라고 아내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곤 했다. 15년간의 프로생활동안 한미일을 오간 구대성의 곁에서 묵묵히 내조를 해 온 권씨는 "선수로도 훌륭했지만 가정에서도 200점짜리 남편이자 아빠"라며 새로운 출발을 하는 남편에게 애정이 듬뿍 담긴 응원을 보냈다.
권씨는 얼마전 남편의 활약상이 담긴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고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날 구대성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정말 혼자 고생 많이 한 것 같다. 내가 옆에서 하나도 도와주지 못 한 것 같아서 미안하다"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오히려 구대성은 "당신이 없었으면 힘들었을 것이다. 가장 어려울 때 곁에서 항상 힘이 돼줬다"며 권씨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고 한답니다.
권씨는 "남편은 항상 가족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야구하는 가장들은 다 똑같겠지만 사실 아이들과 함께 보낼 시간이 부족하다. 하지만 아빠는 새벽에 들어와서 한 두시간 밖에 못 자는 한이 있더라도 오전 7시쯤 일어나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줬다. 단 한번도 그 시간을 어기지 않았다"며 미소를 지었다. 구대성의 이런 가족사랑은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 미국에서 선수생활을 할 때도 그대로였다. "일본과 미국으로 진출하면서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 잦은 이사 때문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곤 했다. 그때마다 먼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서 함께 놀고 친구도 소개시켜 주면서 아이들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됐다"고 한 권씨는 "200점짜리 남편이자 아빠"라며 극찬했다.
구대성은 은퇴와 동시에 호주 프로리그 진출을 선언했다. 권씨는 "큰 딸이 호주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몇년 있으면 대학을 들어갈 나이라 함께 있을 시간이 부족하다며 남편이 결정했다. 마침 호주에서 프로리그가 생긴다는 소식도 들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것 같다"고 했다.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권씨는 남편에 대해 확신에 찬 목소리를 말했다. 일본킬러로서, 한미일 야구를 모두 경험한 선구자로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 권씨를 비롯한 가족의 힘 덕분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구대성 은퇴식 초대받은 15명도 '불패급' - 2010.09.03
'대성불패' 구대성(41, 한화 이글스)의 은퇴식에 초청된 15명의 면면도 그의 선수 생활만큼이나 화려했다.
한화는 구대성이 선수 생활을 하는동안 많은 도움을 준 15명을 은퇴 경기가 치러진 3일 대전 구장에 초청했고, 그들의 격려 문구가 담긴 기념 사인볼로 조형물을 만들어 구대성에게 선물할 예정이다.
초청자 명단에는 구대성의 가족을 비롯해 감독·코치 등 지도자, 그와 함께 뛰었던 동료 선수들이 두루 포함돼있다.
구대성의 아내 권현정 씨는 가족 대표로 은퇴식에 참석하며 한화 이글스 이경재 상근고문, 이남헌 전 대표이사도 자리를 빛냈다. 한국야구위원회(KBO) 기술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인식 전 한화 감독과 1999년 사령탑을 맡아 한화를 우승으로 이끌었던 이희수 KBO 육성위원장도 참석했다.
삼성 선동열 감독과 이선희 스카우트도 초청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구대성의 스승인 故 이성규 씨를 대신해 아들인 이효봉 위원이 나올 예정이다.
구대성과 선수 생활을 함께 한 장종훈, 정민철 코치는 은퇴식에 참석하지만, 한용덕, 강석천 코치는 2군 강진 원정 경기 때문에 불참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코치 연수 중인 송진우도 자리에 나오지는 못한답니다.
한편, 탤런트 전노민 씨와 방송인 남희석 씨도 구대성의 영광스러운 은퇴를 축하하기 위해 대전 구장을 찾을 계획이다.
구대성 "난 던질 수 있어 행복하다" - 2011.12.24
■ 끝나지 않는 전설…시드니 블루삭스의 구대성2000년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뛴 시드니…오늘도 그는 그 마운드에 다시 선다마흔이 훌쩍 넘어 도전한 호주야구…벌써 네번째 나라어느덧 승리의 공식으로 통하는 'KOO!'"아직은 한국에 돌아갈 때가 아니다"하루라도 선수생활을 더 하고 싶은게 그의 뜻이다
그 마운드에 다시 섰다.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일본에서 온 '괴물'과 맞대결하던 자리였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기 위해 160개의 공을 던져야 했던 장소였다. 9회를 홀로 오롯이 버티면서 열한 명의 일본 타자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던 곳이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야구 한국과 일본의 3·4위전. 마쓰자카 다이스케(보스턴)를 상대로 1실점 완투승을 거뒀던 한국의 왼손 투수는 12년이 흐른 지금 '그때 그 곳'에 다시 서 있다. 올림픽 야구 경기가 열렸던 그 야구장은 이제 시드니 블루삭스 소속 구대성(42)의 홈구장이 됐기 때문이다. 구대성이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블루삭스스타디움에는 "쿠(Koo)"라는 함성이 울려 퍼진다. '이제 분명히 이긴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스포츠동아는 화려했던 시절을 뒤로 한 채 호주에서 새 야구 인생을 꽃피우고 있는 구대성과 국제전화로 인터뷰했다. 활기찬 목소리와 담담한 자신감, 그리고 야구에 대한 열정. 한국이 기억하는 구대성 그대로였다.
● '네 번째 나라' 호주에 가자마자 초대 구원왕
그의 이름 뒤에는 '불패'라는 단어가 붙곤 했다. 한국에서 9연속시즌 두 자릿수 세이브(1994∼2007·해외 진출했던 2001∼2005년 제외)와 7연속시즌 20세이브(1996∼2007)를 해냈다. 둘 다 역대 최다 기록이다. 또 역대 두 번째로 많은 통산 214세이브를 올렸다. 200세이브를 돌파한 한국투수는 그와 김용수(전LG), 오승환(삼성) 뿐이랍니다
그런 그가 한국을 떠나 호주로 갔다. "벌써 네 번째 나라에서 야구를 하게 됐다"고 쑥스럽게 웃는다. 1993년 빙그레에서 데뷔했고, 2001년부터 일본 오릭스에서 4년을 뛰다 2005년에는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 유니폼도 입었다. 그가 은퇴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호주로 가기로 했다. 새로 창설되는 프로야구에서 뛰어볼 생각"이라고 했을 때, 전성기를 훌쩍 지난 베테랑이 또 다른 족적을 남길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늘 그랬듯 구대성은 달랐다. 가자마자 호주 프로야구 초대 구원왕에 올랐다. 올스타전 1호 세이브도 기록했다. 은퇴한 '레전드'가 전해오는 승전보에 다시 한국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구대성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어떤 무엇보다 야구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이 곳에 와서 좋아하는 야구를 계속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열정적인 선수들과 함께 하니까 예전에 신나게 야구하던 생각이 많이 난다."
● 옥스프링, 그리고 토마스와의 인연
처음 호주에 왔을 때, 어떤 보직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야구로 영화를 누리려고 온 게 아니었다. 그런데 오자마자 LG 용병 출신인 크리스 옥스프링을 만났다. 플레잉 코치를 맡는다고 했다. 옥스프링이 단번에 케빈 볼스 감독에게 추천했다. "구대성이 한국 야구에서 손에 꼽히는 클로저였다"고. 그래서 구대성은 출발부터 소방수가 됐다. 어디서든 뒷문을 걸어 잠글 운명이었나 보다.
호주는 한 시즌 48경기를 치른다. 구대성은 18경기에 등판해 2승 1패 12세이브에 방어율 1.00을 기록했다. 세이브 1위였다. 새 시즌 첫 경기를 앞두고 열린 시상식. 구대성은 자신의 이름이 영문으로 새겨진 구원왕 트로피를 받았다. 한국에서 상이란 상은 다 받아봤던 그다. 1996년에는 18승 3패 24세이브에 방어율 1.88을 기록해 다승·승률·구원·방어율 1위를 석권하기도 했다. 그해 최우수선수도 당연히 구대성이었다. 하지만 낯선 무대에서 성공적으로 의미 있는 발걸음을 뗀 베테랑에게는 작지만 소중한 상패였다. 그는 "상이란 건 언제 받아도 기분 좋은 것 같다. 생소하면서도 즐겁고 뿌듯하고…. 어쨌든 묘한 기분이었다"고 털어놨답니다
올해도 그는 건재하다. 8경기에서 승리 없이 2패에 4세이브, 방어율 4.82를 기록 중이다. 지난달 24일 애들레이드와의 원정경기에서 한꺼번에 5실점하면서 방어율이 급상승했을 뿐, 나머지 경기에서는 자책점이 0이다. 그는 강조했다. "매 순간이 즐겁고 신난다. 이곳에 와서 나쁜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 최근에는 한화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브래드 토마스가 팔꿈치 수술과 재활을 마치고 시드니 블루삭스에 합류했다. 토마스에게 마운드를 이어 받는 구대성의 모습. 낯설지 않다.
● 호주 교민들의 환대 "구대성이다!"
호주 리그는 출범 후 두 번째 시즌을 치르는 중이다. 아직 야구를 전업으로 삼는 선수들이 많지 않다. 대부분 비시즌에는 다른 일을 하다 시즌이 시작되면 오후에 야구장으로 출근한답니다
구대성은 "여기는 연봉도 없다. 대신 경기마다 출전 수당을 받는다. 20대 초반의 젊은 선수들이 대부분이라 야구를 제대로 하고 싶다는 의지와 패기가 넘친다"고 귀띔했다. 소속팀의 볼스 감독조차 구대성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1975년생이니 말 다했다. 하지만 구대성은 "알려진 것보다 수준이 낮은 리그는 아니다. 빠른 속도로 수준이 올라가고 있고 정말 재능 있는 선수들도 많다"고 했다. 한국에서 수준급 용병으로 꼽혔던 옥스프링과 토마스가 뛰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어딜 가나 구대성은 화제를 만들어 낸다. 하다못해 메츠에서 짧은 1년을 보낼 때도 그랬다. '괴물 좌완' 랜디 존슨의 공을 받아쳐 2루타를 치고 보내기 번트 때 홈까지 쇄도해 득점을 올리는 희대의 명장면을 만들어 낸 주인공이다. 호주에서도 그렇다. 한국에서 슈퍼스타였던 40대 선수가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고, 타자에게 등을 돌리다시피 하면서 공을 감추다가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는 독특한 투구폼도 당연히 화제다. 무엇보다 한국 야구에 목말랐던 호주 교민들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존재다.
구대성은 "경기가 열릴 때마다 교민들이 많이 보러 오신다. 예전에 좋아했던 선수라면서 사진도 같이 찍자고 하시고 사인도 받아 가신다"고 귀띔했다.
● 15번 아닌 30번 달고 '대성불패'
아쉽게도 그는 호주에서 15번을 달지 못했다. '대성불패'의 상징과도 같은 등번호, 한화가 '7억 좌완' 유창식에게 물려준 바로 그 번호다. 구대성은 "입단하자마자 15번을 달 수 있겠냐고 물었는데, 하필이면 시드니 전체 스포츠팀에서 영구 결번이 돼 있는 번호라고 하더라. 그래서 하는 수 없이 30번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제 등번호는 중요하지 않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야구를 계속하게 됐고, 가족(아내 권현정 씨, 딸 영은, 아들 상원)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행복할 따름입니다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가끔 인터넷으로 한국 프로야구 경기를 보고, 예전에 함께 뛰던 동료들의 활약을 보면서 박수를 친다. 무조건적인 응원을 보내주던 한국 팬들도 그립다. 구대성도 "한국에서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다. 지금도 대전구장에서 박수 보내주시던 팬들을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 뿐"이라고 했다. 그래도 아직은 돌아갈 '때'가 아니다. "당분간은 한국에 가서 지도자를 하고 싶다는 마음은 없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오래 야구를 해보고 싶다"는 게 구대성의 뜻이랍니다.
21일. 구대성은 호주 프로야구 사상 첫 올스타전에 외국인 선수로 구성된 월드 올스타팀 멤버로 출전했다. 그리고 8-5로 앞선 9회 마무리 투수로 등판해 세이브를 따냈다. 구대성은 여전히 '불패'다. 장소가 한국이든 일본이든 미국이든 호주든 달라지지 않는다. 상대가 야구든 인생이든 마찬가지입니다